리포트 |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7

In His Pictures
패션과 순수 예술의 영역을 넘나드는 유르겐 텔러

에디터 : 홍석우 | 자료제공 : Open Style Lab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사진’은 온전한 예술의 영역은 아니었다. 보도 저널리즘 혹은 패션처럼 상업 영역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이 가진 특징인 ‘왜곡하지 않은 순간을 담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사진은 예술에 다가서기 시작했다. 사진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순수 사진을 넘어서 일상을 기록한 사적인 다큐멘터리 사진(Documentary Photography)이나 심지어 패션 사진도 그 안에 포함됐다.

테리 리처드슨(Terry Richardson), 마리오 테스티노(Mario Testino), 팀 워커(Tim Walker)는 흔히 패션 사진가로 분류하지만 그들의 작업을 모은 사진집이 수십 권은 나올 정도로 현대 사진의 중요한 인물이 됐다. 그중에서도 유르겐 텔러(Juergen Teller)는, 패션과 예술 사진 영역 모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진가로 유명하다. 1964년 독일 출생의 그는 동시대 사진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진가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Helmut Lang Designs of The Times on i-D magazine The Smart Issue, No. 123, Dec 1993.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Bjork, 1995.

유르겐 텔러는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부터 비비안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셀린느(Celine)의 광고 사진을 찍고,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와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과 협업한 사진집을 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어디선가 그의 전시가 열리며 수없이 많은 패션 잡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한 명이다.

1980년대 후반 그가 사진가로서 첫 일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스멜스 라이크 틴 스피릿(Smells Like Teen Spirit, 1991)>을 발매하기 전의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을 렌즈에 담았다. 비슷한 시기 <더 페이스(The Face)>, <아이디(i-D)>처럼 청년 문화(Youth Culture)를 담은 잡지에 사진을 실으며 서서히 명성을 쌓았다. 기성 잡지와 주류 패션계가 그에게 본격적인 관심을 둔 1990년대 중반부터는 사진집도 꾸준히 냈다. 패션 디자이너 헬무트 랭(Helmut Lang)이 은퇴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브랜드의 온갖 사진을 찍은 것 또한 그였다. 유르켄 텔러의 초창기 사진집은 수집가들의 목록에 올라 판매가의 수십 배 가격에 거래된다. 하지만 유르겐 텔러에게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굳이 나누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인다. 사진은 사진일 뿐이라고 그는 얘기한다.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Juergen Teller, Elizabeth Hamilton, 1998.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Octopussy, Rome, 2008.


“한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에서도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 작품이 상업을 위한 것이냐, 예술을 위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제 작업이 패션 사진의 영역인지, 예술의 영역인지 묻는 말이지요. 화보나 광고를 찍든, 사진집을 내든, 일단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차원적인 예술인지, 상업적인 작업인지에 대한 우려와 고민을 하지 않는 이유는, 기존의 갇힌 틀 안에 저를 가두는 것은 제가 원하는 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Judy Judy Judy, London 2009.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Juergen Teller, Self Portrait, 2010.

그의 사진은 항상 어딘가 기울어져 있다. 얼핏 보이는 인물들은 우스꽝스럽거나 과장되어 있다. 마크 제이콥스 캠페인 광고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 모델이 드레스를 입고, 빅토리아 베컴은 커다란 쇼핑백 안에서 다리와 구두만 보인다. 톱 모델 케이트 모스를 녹슨 수레에 태우고 멍하게 렌즈를 응시하게 하는 것 또한 유르겐 텔러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과도하게 노출한 빛과 슈퍼 모델의 얼굴도 잘라 버리는 과감한 구성, 길거리에 가방 하나 달랑 놓고 찍거나 직접 찍은 초상 사진(Self Portrait)에 자신의 항문을 노출하는 등 일반적인 패션 사진의 규칙을 깨부순 그의 작업은 단순한 스타일을 넘어 하나의 영역이 됐다.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Adidas Originals EQT for Spring/Summer 2017 campaign.

아디다스 오리지널스(Adidas Originals)와 함께 한 캠페인 사진 시리즈나 셀린느의 피비 파일로(Phoebe Philo) 협업 캠페인 사진을 보면 프레임 안에서 전형적인 면을 보여주기보단 이미 존재하는 피사체의 이미지를 자신의 강력한 색깔로 중화하여 혼합한다. 뚝 떨어지는 실루엣의 최소주의(Minimalism) 여성복을 툭 찍어 담아낸 듯한 사진들은 2010년대 최고의 패션 상업 사진 중 하나였다. 한 마디로 대담무쌍하고 항상 경계에 있다. 

유르겐 텔러 이전에도 물론 패션과 순수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진가가 존재했다. 하지만 패션 사진은 순수 사진과 비교하여 ‘전혀 다른’ 영역에서 대우받았다. 이를테면 작가적 시점을 온전히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배제한 작업이므로, 그 가치가 다른 사진들과 비교하면 불멸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요즘은 순수 사진작가들이 패션 사진을 하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유르겐 텔러는 이러한 영역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선대 사진가로서 존재한다.

할리 위어(Harley Weir)와 알라스데어 맥렐란(Alasdair McLellan), 라이언 맥긴리(Ryan McGinley)나 케이이치 니타(Keiichi Nitta)처럼 유르겐 텔러 다음 세대의 사진가들이 유명한 박물관 전시와 무수한 독립 패션 잡지 그리고 패션 하우스 캠페인 작업을 병행할 수 있던 것은 아직 순수 사진과 패션 사진의 경계조차 논의되지 않던 시절의 그가 닦아둔 길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Daria Werbowy for Spring/Summer 2013 Céline campaign. 

이 시대 가장 잘 나가는 패션 사진가 중 하나
© Céline Autumn/Winter 2017 campaign. 

그에게 패션 업계와 일한다는 것은 평소라면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플랫폼이자 개인 작업의 자금 조달 역할을 동시에 한다. “패션 업계에서 일한다고 해도 9시 출근에 7시 퇴근하는 생활이 아니거든요. 기본적으로 즐거운 것이죠.” 그는 드레스나 가방처럼 패션 아이템을 주인공처럼 두면서도 상황을 돕는 양념처럼 보이게 한다. “이브 생로랑(Yves Saint Laurent)이나 마크 제이콥스의 가방이나 옷을 찍을 때, 그 아이템에 대해 큰 흥미를 느끼진 못합니다. 항상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 가방을 들고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제 유르겐 텔러의 사진은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독립 출판물과 잡지, 패션 잡지 광고, 심지어 미술관과 사진집까지 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을 의도치 않게 담아내고, 그 사진을 골똘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훨씬 더 세심한 배려와 구성이 담겨 있다는 점을 점점 눈치채게 된다. 그의 작업 방식이 즉흥적일지언정, 작업의 후반에 들이는 공까지 그러할 거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는 지금도 수 권의 책을 만들며, 사진집 전문 서점과 편집매장의 가장 좋은 매대에 자신의 작품집을 놓고 있지만, 작업 안에 빠져들고 또 남아서 가치를 이룩한 사진을 여전히 담아낸다. 고유한 스타일을 확립한 창작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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